시시한 저녁

<세편의 영화>

unloved 2019. 6. 4. 12:50

넷플릭스 무료 체험 1개월을 다시 뚫었다. 몇년 전에 빨강머리 앤을 보겠다고 1개월을 봤다가 잊고 있었는데, 최근 무슨 심경의 변화에서였는지 딱히 뭐가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는 아니고 그저 그냥 이끌리듯 1개월을 다시 했다. (별 시덥잖은 소리를 참 길게 정성스럽게도 쓴다 싶네)
여튼 그러해서 이것저것 볼만 한 게 뭐가 있나 검색을 하고 있는데, 예전만큼 미드나 영드에 호기심이 생기지도 않고, 다큐멘터리 몇 종을 보다 말았다.
그리고 주말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본 것이 [로마] 와 [밤의 해변에서 혼자] 이 두 편이다.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을 좋아해서 보려고 맘 먹고 있었는데, 영화관은 제한적이었고 어영부영 개봉일도 놓쳐 잊고 있다가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라는 것을 기억하곤 누워서 보기 시작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사실 별 이유는 없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꽤 좋아했던 적도 있었기 때문에 최근의 그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아직도 자신의 삶을 애무하는 영화를 찍고 있는지 궁금도하고, 김민희 배우가 베니스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연기가 어떠한지도 보고 싶고, 이유가 참 많네 그러고 보니. 하지만 무엇보다 보고 싶었던 건 예전 이 영화 개봉 당시 트레일러에 김민희의 노래 부르는 장면이 있었는데, [잘 사시는지 아시나요 나의 마음을...] 하며 흥얼거리던 모습이 신선했고,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 때 기분이 갑자기 떠올랐고, 그래서 어젯밤에 불 꺼 놓고 봤다.

그리고 플랫폼을 달리하여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영화관에서 보았고.

세 영화를 나열해 보니 죄다 상 받은 작품이구나.
[로마]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밤의 해변에서 혼자] 베니스 영화제 여우 주연상 [기생충]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세 편 모두 만족스러웠고 재미있었는데 워낙 오랜만에 영화란 걸 봐서 그러한지 영화 감상을 표현할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괴롭다. 읽지 않고 쓰지 않으니 사람이 이렇게 퇴보하는구나. 매일 읽는 조각 뉴스들처럼 내 생각도 하나로 쭉 이어지질 못하고 조각조각 단편단편이다. 마치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부분부분만 묘사하고 그치는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우연찮게 연속으로 보게 된 다른 세 편의 영화에서 나는 또다시 삶이란 것이 모래성 싸움의 모래 위에 세운 나뭇가지가 생각났다.
어찌나 허약한지, 좀만 툭 건드리면 쓰러질까 야곰야곰 모래를 걷어내 보지만 결국은 쓰러지고 마는 싸움. 쓰러뜨리는 게 내가 아니길 바랄 뿐, 쓰러짐을 막을 순 없는, 그런 모래성 싸움.

[로마]의 클레어가 아무리 깨끗하게 바닥을 청소해도 금방 개똥으로 바닥이 드러워지듯
[기생충]의 기우가 계획을 가지고 인생을 꿈꿔보지만 결국 계획으로 되는 건 하나도 없는 유계획이 무계획으로 좌절하게 되듯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영희가 사랑 뒤에 오는 외로움과 아픔에 온몸과 삶이 할큄을 당하듯

우리는 모두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우리는 모두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고, 그 뒤는

그래

클레어는 여전히 옥상으로 빨래를 널기 위해 올라하고
기우는 현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계획을 다시 한 번 세우고
영희는 낮의 해변을 혼자 걷는다.

참 좋은 영화였다.
세 편 모두.

흡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