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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watermelon sugar

삶은 고요한 듯 하다가도 본문

시시한 저녁

삶은 고요한 듯 하다가도

unloved 2015. 3. 18. 14:50

삶은 고요한 듯 하다가도, 일거의 공격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기도 한다. 

어제도 그렇고 계속 나이가 들면, 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아 꼰대가 되는 것 같아 나도 별로 나이가 드니 라는 말을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확한 표현이 나이가 들면, 밖에 없으니 어쩌란 말이냐.ㅋㅋ

단어의 깊이가 일천하여 이러하니 뭐 나 자신을 욕할 수 밖에.

각설하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시간에 갑자기 집에서 전화.

아,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지.

그리고 그 전화 한 통으로 나는 죽음을 접했다.

그 뒤로 우리 가족들은 전화 소리만 들어도 깜짝깜짜고 놀라던 때가 있었고, 나역시 그 이후로 가족에게 오는 전화는 한 번 정도 가슴을 누르고 받곤 한다. 나이가 드니 그렇다.

자맷님의 전화이고, 아버지가 수술을 하신다는 거였다.

뭔가 아버지, 수술. 이런 단어들이 한 문장으로 나에게 인식되지 못하고 아버지 .... 수술... 각각 다른 단어들로만 입력이 되어 현실감 없이 입 속에서 맴돌았다. 그래서 나는 문장의 이해도 없이 그저 똑같이 되물어 보는 것밖에 할 말이 없었고.

협심증 때문에 병원에 가셨는데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집에 계신 모친이 동의를 해 줄 수 있을리 만무하니 오빠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그 즉시 오빠는 병원으로 내려가고 내려가면서 나에게 전화를 한 모양인데 난 점심 시간이라 전화를 못 받으니 자맷님이 나에게 다시 한 것이다. (형제가 많으니 이리 꼬이고 저리 꼬여도 어쨌든 연락은 된다.)

오빠는 운전 중이라 통화가 안 되었고, 아버지의 첫 수술에 우리는 어찌해야 하나 난감난감.

늘 기운 차고 강단 있으시던 아버지셔서 수술이니 병원이니 이런 거는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가 띵 머리를 맞은 느낌이라 뭔가 아직도 현실감이 없긴 마찬가지.

그렇게 동동 점심도 뜨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문자가 도착.

아버지 수술 잘 끝나고 내일 퇴원할 수도 있다고? 수술이 아니라 시술 정도라고?

뭔 해프닝인지?

자식들 걱정할까봐 그냥 혼자 차를 끌고 가서 입원하고 수술하고 지금은 중환자실에서 밥을 드시고 계신단다.

전화도 안 되는데 그냥 받고 있다며 음식물을 씹으시며 전화를 받으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니 헛웃음도 나고 기분 좋기도 하고 그랬다.

올 필요도 없고 내일 퇴원을 하실 거라고 하는데, 내가 그 일 이후로 느낀 것이 있다면 사람 일이란 것은 사람의 시간이라는 것은 함부로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당신은 괜찮다 하시고 목소리도 정정하시지만 일단 지금 계신 곳은 30분만 면회가 되는 중환자실이니 안심은 이르다. 

내일 휴가를 내서 가 보아야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아버지의 수술 때문에 놀라셨을 모친을 생각하니 더욱 걱정이 앞선다. 오늘 하루 집에서 혼자 밤을 보낼 모친을 위해 구미에 있는 자맷님에게 오늘 하루 있어 주라고 전화를 넣었다.

나도 내일 내려갈 참이라고. 

전화에 민감하고, 깜짝깜짝 놀라던 모친의 모습이 선해서 더욱 짠하다.

그런데 하도 자식들이 전화를 해 대니 오히려 정신도 없고 밥도 못 먹을 지경이라고 하여 자제를 하였다.

내가 사랑하는 미드 중에 하나인 보스턴 리걸에서 내가 늘 기억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로펌의 이사인 셜리 슈미트가 요양원에 있던 아버지의 임종을 맞는 장면이었다.

아버지는 슈미트의 롤 모델이었으며 훌륭한 법조인이었으나 은퇴를 하고 요양원에서 생을 보내고 있었고 마치 당연한 수순처럼 죽음을 맞이하였다.

아버지의 임종 자리에 갈 때까지 그녀는 아주 고요했고, 울지도 그렇다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캐릭터처럼 균형감 있는 표정으로 아버지와 대면했고, 그 자리에서 오열을 터뜨렸다.

그녀는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물론 정확하진 않다. 나는 그 대사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맞다.

아버지가 아프시고 요양원에서 계실 때부터 나는 늘 아버지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늘 의연하려고 했고, 슬픔을 발산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그렇게 예상하던 죽음이라 할 지라도 이렇게 닥치니 너무 슬퍼 말이 안 나온다... 는 대충 이러한 말.

이상하게 나는 그 대사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고, 부모는 연로하고, 그러면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시겠지.

나는 성인이 되고, 늘 그러한 불안함에 휩싸여 살아왔다. 

부모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부모와의 물리적 거리가 서울에 있는 친구들보다 멀어서 그것이 나를 힘들게 했고, 늦둥이로 태어나 어렸을 땐 늙은 부모에 대한 억울함에 가슴이 답답했던 것이 이제는 부모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가슴이 먹먹하다.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사서한다지만, 아무리 하지 않으려고 해도 떼어지지 않는 문제일 뿐. 

나란들 하고 싶어서 할까.

아버지의 병원행으로 인해 걱정이 많고, 생각이 많고, 게다가 비까지 오니 이건 뭐 일하지 말란 소리지..ㅎㅎ

내일 휴가나 내야겠다.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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