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watermelon sugar
어서. 본문
늘 느끼는 것이지만 봄은 목덜미에서부터 온다.
무의식중에 목이 없는 셔츠를 꺼내 입고 나갔는데도 목을 휘감고 도망가는 바람이 전혀 춥지 않다. 살금살금 목 뒤로 숨어서 웍, 하고 도망치는 귀여운 조카 녀석처럼 봄은 그렇게 온다.
나는 이은주라는 배우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그 배우가 가진 묘한 분위기만은 다른 사람들말마따나 인정하고 있었다. 요사이 예전에 보았던 '연애소설'이라는(아, 연애소설이 맞는 것인가?) 영화의 한 장면이 계속 떠오른다.
당시 인기 많았던 배우들은 다 데려다 호기롭게 찍은 영화였지만 그다지 재미는 못 본 영화 중 하나인데, 각별한 친구였던 이은주와 손예진,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차태현의 묘한 우정과 사랑 뭐 제목 그대로 심심한 연애소설류 영화였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여간 심심한 것이 아니어서 굳이 말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지만, 여하튼 요즘 내 머릿 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이은주가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시계를 맨손으로 치며 시계를 되돌리는 장면과 시간이 흐른 후 붕대를 감고 차태현에게 나타나는 장면이다.
왜 그 장면이 떠오르는지 나조차도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 떠오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하지만 사랑도 해야겠고 친구도 버릴 수 없는, 참 골치 아픈 상황에서 방황하다 결국 친구의 죽음 때문에 폭발하는 장면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부끄러워 비슬비슬 나타나는 모습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하게 연기했던 이은주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가 가진 묘한 분위기라는 것을 나는 그러한 연기에서 유독 느꼈다. 정직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껴 늘 솔직한 것을 어려워하는 전혀 귀엽지 않은 성격의 여자 아이. 그녀는 그런 연기를 아주 잘 했었다, 맞다.
이제는 없는 그녀를 봄이 오는 어느 날 내가 꽤 진지하게 떠올렸다는 것을 기억하고자 이런 말도 안 되는 포스팅을 해 본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악인'이라는 영화도 보았고. 영화가 좋아서 초기작만 탐독하고 끊었던 요시다 슈이치의 원작 소설도 읽어 보고 싶다.(지금 쌓아 놓은 책만 해도 ㅎㄷㄷㄷ인데.ㅠㅠ)
어서
오소서.